두 사람의 인물로부터 이어지는 노고(勞苦)의 섬

 
 
남이섬.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있는 가평나루에서 남이나루로 가는 그 짧은 시간에 나는 또다시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생각한다. 왜 남이섬에만 오면 입구에서부터 어린왕자가 갑자기 떠오르는 것일까?….

아이들은 맑은 눈을 가지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지만, 어른이 되어 갈수록 세상에 오염된 마음의 눈은 이제 보이는 것밖에는 보지 못한다. 아니 그 이상을 볼 수도 없다. ‘어린왕자’와 ‘남이섬’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항상 보이는 것만을 고집한다. 아니 더러는 전혀 사실이 아닌 이야기에도 현혹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 남이섬의 구석구석을 돌며 눈에 보이는 것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쓸모없이 버려져 있던 모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남이섬은 경기도 가평군에서 남쪽으로 약 3.8km 지점에 있으며, 행정구역상 춘천시에 속하나 가평군 달전리와 접하므로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거쳐 간다. 조선 세조 때 이름난 무관인 남이장군의 묘가 있다고 하여 남이섬이라 했다. 총면적은 약 0.453㎢이며, 둘레는 약 4km이다.

청평 댐을 축조하기 시작한 1939년 이전까지는 홍수 때만 생기는 섬이었으나, 댐의 완공으로 수위가 높아지면서 완전한 섬이 되었다. 그 후 방하리의 주민이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다가, 1960년대 중반에 경춘관광주식회사에서 이 섬을 매입하여 관광지로 조성했다.

수재 민병도와 강우현

 
 
남이섬이 관광지로 조성되는 시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이섬을 이야기할 때 꼭 거론되는 인물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된 수재 민병도 회장이고, 또 한 사람은 지난 14년간 남이섬 대표를 지낸 강우현 사장이다.

1965년 수재(守齋) 민병도(閔丙燾, 1916년 1월 9일 ~ 2006년 3월 5일) 회장은 한국은행 총재를 사임하면서 받은 퇴직금 등을 모아 청평호 가운데 박힌 이 모래섬을 사들였다. 어느 날 경춘가도를 달리다 강에 떠 있는 반달 모양의 섬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나룻배로 섬을 드나들던 시절, 민 회장은 이 불모의 땅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섬은 온통 모래밭이어서 나무는 심는 족족 말라죽었다. 그래도 그는 잣나무, 벚나무, 자작나무, 메타스쿼이아를 심고 또 심었다.

여러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민병도 회장은 경성부에서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갑부였던 민영휘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경성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의 게이오의숙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사하여 근무했다. 아버지 민대식이 창설한 동일은행 취체역을 지냈으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1938년에 주식회사로 전환할 때 발기인을 맡는 등 젊은 나이에도 조선 실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도 기업인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그랜드하얏트호텔 회장과 학교법인 휘문학원 이사장을 역임했고, 조흥은행 상무이사를 거쳐 한국은행 제7대 총재를 지냈다. 현대미술관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사인 을유문화사와 대한민국 최초의 교향악단 고려교향악단을 설립하고 윤석중과 함께 ‘새싹문학’을 창간하는 등 문화예술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은행 수석 부총재로 재임 중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유창순이 한국은행 총재가 되었고, 유창순이 증권파동과 한국은행법 개정 와중에 물러나게 되자, 민병도는 총재로 승격했으나 외환위기 속에 쿠데타 세력과 차관 도입에 대한 의견 대립을 일으켜 약 1년 만에 사직했다. 이때의 일을 쿠데타 정권에 항거하고 반기를 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1955년 그는 청평댐 건설로 생겨난 강원도 춘천의 남이섬을 구입한 뒤 장기간에 걸쳐 나무를 심고 가꾸어 휴양지로 꾸민 남이섬의 설립자가 되었다. 남이섬에서 거주하다가 2006년에 사망했으며, 이 섬에는 민병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국민훈장 목단장을 서훈 받았다.

그리고 또 다른 이름은 강우현 사장이다.

강우현 남이섬 대표이사·사장은 195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그는 제일은행, 서울랜드, 국립극장 등 40여 개 기업과 단체의 캐릭터와 CI를 디자인 했고, ‘양초귀신’ 등 그림동화 9권과 산문집 ‘상상망치’ 등 여러 권의 저서를 펴낸 디자이너이자 아동 문학가이고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다.

그는 지난 2001년 단돈 100원의 월급쟁이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경치는 운치로, 소음은 리듬으로, 유원지는 관광지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4년간 남이섬을 리디자인했다. 구석구석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그는 돌 하나, 나무 한 그루까지 남이섬의 모든 것에 숨을 불어넣었다. 남이섬에 즐비하던 폐병과 쓰레기도 그의 손에 닿으면 작품으로 변했다.

현재 남이섬은 연간 300만명이 찾는 특급 관광지가 되었고, 대한민국 외국인 관관객 1400만명 시대에 100만명이 남이섬을 찾을 정도로 한국관광에서 차지하는 몫이 적지 않다. 년간 남이섬의 매출은 300억원, 영업이익도 80여억원의 우량기업이 되었다.

남이섬의 성공 신화에는 이렇듯 강우현 특유의 역발상 경영이 통했다.‘내버리면 청소, 써버리면 창조, 팔리면 상품, 안 팔리면 작품’이라는 그의 역발상 어록은 유명하다. 그의 말처럼 ‘남이 하는 것을 반대로 하는 거꾸로 경영이 황금알을 낳은 것’이다.

그는 2001년 남이섬과 인연을 맺은 뒤, 남이섬 성공신화를 선두에서 지휘한 주인공이었다. 그런 그가 지난 12월 31일 남이섬을 떠났다. 그의 사임은 갑작스런 소식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는 지난해 이미 마음의 이사를 끝낸 상태였다. 그는 이미 남이섬 보유의 제주도에 제2의 남이섬을 만들기 위해 지난여름 내내 일주일의 반은 그곳에서 보내며 네버랜드를 구상하는 삽질을 했다. 또 다른 상상의 나라를 땅에 그리며 검게 그을린 채 들떠 있는 그는, 14년전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그가 구상하는 네버랜드에는 동화책 나라가 그대로 펼쳐진다.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는 그 이상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현재 강 대표가 맡고 있는 남이섬 관계사 ㈜상상그룹과 자나라인㈜ 대표이사, (사)상상나라연합 사무총장, 남이섬세계책나라축제 국제위원장 등 직책은 계속 유지된다.

그리고 남이섬 사람들

 
 
이렇듯 이 두 사람을 떼어 놓고는 오늘의 남이섬을 이야기 할 수 없다.한 사람은 불모의 남이섬에 고집스럽게 나무를 심었고, 다른 한 사람은 열심히 그 나무를 가꿔 꽃을 피게 했다.

사람들은 점차 유원지로 변해가는 남이섬에서 MT를 하고 데이트를 즐기고, 야영을 하며 청춘의 꿈을 이야기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나이가 좀 들은 중·장년층의 어른들에게 남이섬은 지난날의 아련한 추억이 숨어있는 보물섬과도 같은 소중한 장소로 기억된다.

이제 남이섬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관광성지가 되었다. 강변가요제와 겨울연가가 아니어도 충분히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한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 민병도와 강우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말고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남이섬을 만들고 가꾸었다. 남이섬에는 현재 종신직원 다섯 분이 계신다. 대부분 남이섬에 청춘을 바친 개국공신이요 산 증인들이다. 이들의 30년 인생은 고스란히 남이섬의 30년 역사를 가리킨다. 그밖에도 300여명의 직원들과 그들 속에 파묻혀 묵묵히 선대의 뜻을 좇는 민병도 회장의 아들과 손자들이 있다. 그들은 다른 직원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남이섬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허드레 일을 도맡아한다. 그들에게 남이섬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노고가 서려있는 땅이며, 선대의 노정을 조금이나마 경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남이섬을 찾아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심고 가꾼 나무들 앞에서 즐겁게 사진을 찍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덩달아 기뻐한다. 모두가 일류대학을 나왔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남이섬으로 돌아와 나무를 가꾸고 흙을 날랐다. 창평(創平), 민병도 회장이 평소 남이섬의 정신으로 부르짖던 ‘만들어서 세상과 나누라’는 창조와 나눔의 정신을 그들은 철저하게 지키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은 그들의 거친 손과 악수를 할 때마다 선대의 명예와 노고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다른 직원보다 더 모범을 보이고, 열심히 노동을 하는 모습이 안타깝게 생각될 때도 있다.

단절을 모르는 남이섬의 사계

 
 
여우는 어린왕자가 살았던 행성의 장미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네가 길들인 것에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넌 네 장미에 대한 책임이 있어…."

남이섬을 만든 사람들은 날마다 그 말을 되 뇌이듯, 그들이 만들고 가꿔온 남이섬에 대한 책임을 지려한다. 그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봐야 되는 것처럼 남이섬에 가면 눈에 보이는 것 만 쫓지 말고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의 눈을 열기 바란다. 그리고 그 열린 마음으로 잃어버린 순수함에 대해 다시한번 기억을 더듬는 그런 추억의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척박한 남이섬을, 쓰레기 더미의 유원지를, 오늘날의 경이로운 관광지로 만든 두 사람과, 오늘도 그들의 노고에 끊임없이 덧씌우기를 하며 남이섬을 가꾸고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 모두의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은, 최소한 그들은 우리들 모두에게 추억을 곱씹게 하고, 새로운 세대에게는 추억을 갖게 하는 동화 같은 나미나라를 여전히 만들고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남이섬의 사람들은 단절을 모른다.
봄에 여름을 생각하고, 여름에 가을을, 가을에 겨울을, 겨울에 봄을 미리 생각하고 온몸으로 실천한다. 한발 더 나아가 봄에 가을을, 가을에 봄을 미리 살아가는 것이다. 봄의 신록도, 여름의 청량함도,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눈과 얼음과 고드름도, 남이섬은 그 섬을 가꾸는 사람들의 구릿빛 근육을 통해 나온다. 이것이 내가 남이섬의 뱃전에만 서면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 이야기를 떠올리는 가장 큰 이유이다.

[코리아프레스 = 김세중 논설위원]

관련기사
저작권자 © 코리아프레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