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세브란스 이야기'와 '제중원 뿌리논쟁'

 
 

[코리아프레스 = 안현아 기자] 한국의 서양의료사와 그 시원논쟁을 정리한 두 권의 책이 나란히 나왔다. 연세대 의사학과 신규환 연구조교수와 경희대 사학과 박윤재 부교수가 쓴 '제중원·세브란스 이야기'와 연세대 의사학과 여인석 교수와 신규환 조교수가 낸 '제중원 뿌리논쟁'이다.

조선정부가 설립한 첫 서양식 병원이었던 '제중원(濟衆院)'. 이 의료기관의 등장으로 우리 의료역사가 크게 달라졌다. 한의학 중심의 전통의료에 양의학이 가세함으로써 바야흐로 동서 의학이 병존하는 시대가 열리게 됐다.

한국 의료계에 서양의학이 들어오게 된 계기로 다소 극적이고 우연이었다.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자객의 습격을 받고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위기에 처했다. 열세 번이나 칼에 찔린 그는 미국공사관 소속의 선교의료사 알렌의 외과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를 계기로 고종과 조선정부는 알렌(1858-1932)은 물론 서양의학에 깊은 신뢰를 보내게 된다. 왕실의 믿음을 얻은 알렌은 조선정부에 '병원건설안'을 정식으로 제안하고 혜민서 혁파 등으로 새로운 의료기관을 고려 중이던 조선정부는 알렌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최대의 서양식 근대병원은 이렇게 탄생했다. 갑신정변의 이듬해인 1885년이었으니 올해로 첫 서양식 병원의 창립 130주년을 맞았다. 맨처음 이름은 '광혜원(廣惠院)'. '은혜를 널리 베푸는 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다 보름 뒤 '사람을 구하는 집'이라는 뜻의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 어원은 논어의 '박시제중(博施濟衆·은혜를 널리 베풀고 사람들을 구제하다)'이었다.

저서 '제중원·세브란스 이야기'는 이밖에 최초의 서양의학교육기관이었던 제중원의학당과 조선의 첫 의료선교사로 정식 임명받아 파송됐던 존 헤론, 여성해방을 꿈꿨던 간호사 정종명, 농촌위생의 개척자 이영춘 등의 이야기를,  '제중원 뿌리논쟁'은 이런 한국의 서양의료역사를 바탕으로 작금의 논쟁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 1970년대 말부터 제기된 제중원의 뿌리논쟁은 제중원은 당연히 세브란스의료원의 기원이라는 연세대 의대 측과 제중원이 조선정부의 소속기관이었다는 점에서 자신들이 시원이라는 서울대 의대 측이 맞서 있는 상황. 저자가 모두 연세대 의대교수들인 이 책은 따라서 객관성에서 다소 미흡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서양의학은 경이롭게 여겨졌다. 칼로 난자당한 피해 환자가 수술이라는 의술을 통해 회생한 것에 대해 그만큼 놀라움이 컸다는 얘기다. 한의학으로서는 순간적인 지혈조차 쉽지 않은 마당에 동맥을 잇고 상처를 봉합해냈으니 실로 경이로울 만도 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그 운영권을 1894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한다. 이에 따라 선교병원으로 성격을 달리하게 된다.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인 재동에 있던 제중원은 을지로의 옛 지명인 구리개 시절을 거쳐 1904년에 서울역 앞에 있는 도동으로 옮겨진다.

정부 설립병원에서 선교의료시설로 전환한 제중원은 미국 클리블랜드 출신의 석유부호였던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의 기부금을 받으며 세브란스병원으로 성장·발전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록펠러와 함께 스탠더드 오일의 창립자이기도 했던 세브란스는 그 이름처럼 자선과 기부로 평생을 바쳤다.

제중원 논란은 최근 발생한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의 흉기 피습사건을 계기로 다시 일었다. 리퍼트 대사가 입원치료 받은 세브란스병원이 치료 경과를 설명하는 브리핑에서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은 제중원"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자 서울대병원측은 "제중원을 운영하는 데 알렌 박사가 역할을 많이 한 것은 인정하지만 이를 두고 제중원은 세브란스병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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