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퇴직율이 작금년에 이르러 유난히 격증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직업공무원제도확립, 제반행정의 안정도문제, 나가서는 국가시책의 유감 없는 말단침투 문제라든지 국민의 일상생활에 까지도 적지 않은 주름살을 가져오게 할 염려를 예견케 하는 일로서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고 하겠다.
9일 총무처 당국자가 밝힌 바에 의하면 60연도에 1.8%이던 퇴직율이 67년에는 6.5%로 3.7배나 늘어나고 있는가 하면 68연도만도 5월말 현재까지 이미 1만2천3백여명의 공무원이 퇴직했다는 것이므로 이대로 가면 금년도의 퇴직율은 작년도의 퇴직율 6.5%선을 훨씬 상회할 것이라는 전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교육공무원을 주로 하는 문교부의 이직자 수가 수위이고 다음은 경찰관을 주로 하는 내무부가, 세째는 철도청과 체신부 등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이라고 하겠다.
... 農村實情(농촌실정)은 極度(극도)로 疲弊(피폐)되고 있어 現在(현재)부터 草根木皮(초근목피)로 救命(구명)을 하고 있는 形便(형편)에 있어 바야흐로 目不忍見(목불인견)의 慘狀(참상)을 보이고 있다는 報告(보고)를 接受(접수)하고 財務部當局(재무부당국)에 對(대)하여 前記(전기) 農民...
『수수죽』끓이는 層(층)은 上流(상류) 浮黃症患者續出(부황증환자속출)
1957.02.23 동아일보 3면
대부분의 세농층에서는 초근목피(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한지 벌써 三(삼)개월 이상이나 되어 한면(面(면))에서 평균 三(삼)십여명의 부황증(浮黃症(부황증)) 환자가 발생하는 등 참상을 이루고 있다 한다 이에....
○┉실업고교졸업생에게는 이제 취직난이란 어휘가 실감이 나기 않게 됐다. 작년부터 넓어지기 시작한 취직의 문은 금년에도 계속 넓어져 졸업생의 수가 수요에 따르지 못할지경이라고 각고교의 취직담당 교사들...
한달 앞당겨 마감된 취직戰線(전선)
1968.10.26 경향신문6면
한달 앞당겨마감된 취직戰線(전선)
대학 졸업생 고교 졸업생 여자實業校(실업교)등 스카웃손길 치열 되려 求人難(구인난) 빚어내... 각업체의 스카웃전 때문에 11월까지는 4백23명의 취직희망자가 모두 직장을 갖...
激動(격동)하는 韓國財閥(한국재벌) (1) 프롤로그
1968.07.03 경향신문 2면 경제 기사(기획/연재)
一流大學(일류대학)에 대한 立稻先賣式 人材(입도선매식인재) 스카웃戰(전)은 이제 海外留學生(해외유학생)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대부분의 企業主(기업주)들은 새로운 經營(경영)모토와 상징을 내...
돈 (85)
1968.08.22 매일경제 2면 경제 기사(기획/연재)
중학교를 졸업하고 4년째 판금공으로 일하는 李(이)씨(27세)는 T興業(흥업)에 「스카웃」당하여 월 2만3~4천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숙련공이 되면 대개 이정도의 수입은 올린다고 한다. 최고로 많이 받는 사람은...
1968.7.10 경향신문
사설
공무원퇴직 격증 문제
공무원의 퇴직율이 작금년에 이르러 유난히 격증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직업공무원제도확립, 제반행정의 안정도문제, 나가서는 국가시책의 유감 없는 말단침투 문제라든지 국민의 일상생활에 까지도 적지 않은 주름살을 가져오게 할 염려를 예견케 하는 일로서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고 하겠다.
9일 총무처 당국자가 밝힌 바에 의하면 60연도에 1.8%이던 퇴직율이 67년에는 6.5%로 3.7배나 늘어나고 있는가 하면 68연도만도 5월말 현재까지 이미 1만2천3백여명의 공무원이 퇴직했다는 것이므로 이대로 가면 금년도의 퇴직율은 작년도의 퇴직율 6.5%선을 훨씬 상회할 것이라는 전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교육공무원을 주로 하는 문교부의 이직자 수가 수위이고 다음은 경찰관을 주로 하는 내무부가, 세째는 철도청과 체신부 등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이라고 하겠다.
박봉과 전직으로 해마다 공무원들의 이직율이 늘어 나고 있다. 29일 총무처 집계에 의하면 금년도 공무원 이직율은 11월 현재 8.4%에 2만6천명으로 작년도의 7.6% 67년도의 6.5%보다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공무원별 이직율은 지방공무원이 3천6백8십7명으로 으뜸이고 다음이 기능직 3천1백7십5명 중고교 교사 1천5백4십8명 국가공무원 7천3십7명의 순으로 돼있다.
이직요인은 가정사정이 3천5백24명으로 으뜸이고 다음이 전직 3천3백5십2명 생활고가 2천3백9십명이다.
小兒期(소아기)의 肥滿症(비만증)… 減食療法(감식요법)이 좋아
1968.09.16 경향신문 5면
小兒期(소아기)의 肥滿症(비만증)┉減食療法(감식요법)이 좋아 근래 유난히 살이쪄서 걱정되는 肥滿兒(비만아)가 부쩍 많아졌다. 비만증을 지방증가로 일어나는 이상현상이고 체중이 같은 또래의 다른아이보...
건강의 赤信號(적신호) 肥滿症(비만증)
1968.11.26 매일경제 3면
건강의 赤信號(적신호) 肥滿症(비만증) 熱量(열량)소모보다 많은 「칼로리」 섭취에 기인 淑大(숙대) 金尙淳(김상순) 교수의 助言(조언) 밥... 발병할 우려가 많아 비만증은 건강의 적신호로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
意見(의견) 봄의 입김
1971.04.08 매일경제 1면 사회 기사(칼럼/논단)
... 농어민들은 오랜 歲月(세월)동안 잔인한 봄철을 수없이 되풀이 맞이하였었다. 이른바 端境期(단경기)를 당하면 산과 들로 나가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하던 것이 얼마 멀지않은 시절의 현실이었다. 日帝(일제...
1969
[ ..... 울산은 ... '기적의 한국부흥' ..... 자립한국이 공업입국의 꿈을 이룩하는 위대한 심벌 ........
..... 한국비료는 .... 연산 33만톤이라는 세계 최대의 규모. ........ ]
1969.6.5. 매일경제
" 기적의 부흥 ...
넘치는 활기 ... "
'기적의 부흥' 속에 아침해가 뜨고 넘치는 활기 속에 하루가 지나가는 건설보 - 그것은 '오늘의 한국'을 구경한 사람들의 거개가 느끼는 감회일른지도 모른다. 지난 4월 16일부터 3일간 워커힐에서 열린 제4회 한일신문편집간부 '세미나르'에 일본측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일본공업신문 편집국장 朝倉金三 씨도 이러한 인상을 가슴에 품고 돌아간 방문객 중의 한사람이었다. 눈부신 발전과 스케일의 방대한 설계, 그리고 한일경제협력에 대한 당당한 우리측의 논진에 압도된 듯한 그 놀라움 - 그의 소견에 의하면 박대통령 영도하의 한국은 그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일로매진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양언하고 있다. 이러한 외국인의 눈에 비친 우리의 건설상을 훑어보는 것은 우리의 내일을 위한 자신을 더 한층 북돋워 주리라 믿고 아래에 그 일부를 소개하여 우리의 전진에 더 한층의 활력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펀집자 주]
정부수뇌들도 불철주야로 진력
울산공단지엔 경탄뿐
일본과 어깨 겨루는 고도성장 ... 13.1%
가깝고도 먼 나라 ... 한국의 인상
가깝고도 먼나라, 그리고 활력에 넘치는 불가사의한 나라, 이것이 나의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하네다 공항에서부터 붉은 흙으로 덮힌 서울교외의 김포공항에 이르기까지 제트기로 불과 2시간의 거리. 일본으로 말하자면 한국이란 나라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외국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일본문자는커녕 한문도 거의 쫒겨나다시피 찾아볼 수 없고 한글 일색 (간혹 영어가 섞일뿐)으로 뒤덮힌 국내 상황. 인텔리 층의 격렬한 대일불신 등이 뿌리 깊게 도사리고 있음을 알고 나서 나는 저윽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극단에 가까우리만큼 심한 무역의 입초. 총예산의 25%를 차지하는 국방비, 무역수지의 만성적자, 농림의 부진, 대도시에의 인구집중, 실업자 등 어두운 일면이 있는가 하면 세계 최대인 연산 33만톤의 요소비료공장(한국비료 울산공장), 동양 최대의 연산 1백90만톤의 쌍룡시멘트 동해공장, 도요다(豊田) 미 포드 이 파이아트 등 3개의 합작자동차회사와 항공기의 발착륙이 가능한 서울을 기점으로 전국에 걸친 고속도로망, 서울 시내에 꼬리를 물고 일어서는 20여층의 고층빌딩, 이밖에도 세계최고의 고도성장을 자랑하는 일본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13.1%의 경제성장률은 모두 밝은 내일을 빛내주는 소재들이다.
한국의 산업시찰에서 역시 주목을 끌게 한 것은 울산중화학공업지대의 놀라운 발전상이라 할 것이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에 박대통령이 공업입지에의 첫삽을 넣기까지는 울산은 인구 3만에 불과한 한적한 어항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13만을 옹립하는 도시로 부풀어올라 국제적인 기술수준과 스케일이 큰 근대공장들이 들어서 '기적의 한국부흥'을 이루고 있어 이곳은 자립한국이 공업입국의 꿈을 이룩하는 위대한 심벌이 되고 있다.
그런만큼 경계도 엄중하여 공업지대에 이르는 메인 웨이의 요충은 빼지 않고 헌병들에 의해서 물샐틈 없이 방비되고 있을 뿐 아니라 통행하는 차량마다 멈추어 서서 검사를 받아야 하고 모든 공장의 문어귀마다 가드맨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여하간 이 울산공업지대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대한석유공사 (미 걸프석유가 95% 출자)가 지닌 석유정제설비는 오늘날 일산원유처리능력 11만5천 배럴이라는 바 실제로는 13만6천 배럴의 능력을 갖추고 있어 규모로 미루어보더라도 일본의 중견 클라스엔 뺨을 치면서 끼일 수 있을 정도.
이보다 몇년 뒤 떨어져 완성된 한국비료는 삼정물산 등 삼정 그룹의 원조에 의해서 동양고압(현재의 삼정동압화학)의 요소기술을 중심으로 연산 33만톤이라는 세계 최대의 규모.
거기에 9만톤의 저장능력을 가진 동양 제1의 창고를 끼고 있다는 장점, 실로 한국비료공업은 세계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느낌이 짙었다.
宇部흥산 회사로부터 카프로락담을 수입해서 나일론사를 만들고 있는 동양 나일론의 플랜트 역시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2,3차 5개년계획을 매듭짓고 5백달러의 국민소득과 30억 달러의 수출목표를 달성하고 계속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보장하면서 균형된 사회개발 속에서 풍요한 국민생활과 이를 통한 남북통일에의 조건완숙과 세계로 뻗어가는 민족중흥의 내실을 약속하고 서로 맹세한 70년대가 어김 없이 4천만 동포의 안전에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는 60년대에 쌓아 올린 건설의 피땀을 결정하며 이를 더욱 발전시켜 김일성 집단의 온갖 음모와 도전에 대하여 국토통일로 응수하고 사상 박정희 시대의 신화를 구상화 하는 새 시대의 새 시련을 맞이한 것이다.
회고컨대 1,2차 경제계획으로 시종한 지난 10년 동안 방대한 생산시설과 조직, 사회간접시설의 확충, 유통시설과 체계의 개선, 과학기술의 고도화, 기업의 경영관리조직의 훈련강화 등에 의하여 기적에 가까운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경제성장의 추이를 보건대 1951년 - 61년은 4.8%이던 것이 62년 - 66년은 8.5%, 67 - 69년은 12.5%로 점승하고 있다. 사실상 작년도로써 중요사업은 거의 끝났고 여유 있는 조정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오늘 우리들이 그 위에서 살고 있는 주요경제지표를 보면, 일인당 1백95달러의 GNP, 7억 달러의 수출, 5억2천만 달러의 외환보유, 95%의 재정자립달성을 비롯하여 연간 10%를 약간 상회하는 소비자물가추세, 5%의 실업율, 3백50만톤의 시멘트, 163만kw의 발전시설용량, 1백9억톤의 총화물 수송량과 2백67억인의 총여객수송량,11만대의 자동차 보유, 43만2백명의 전화가입자, 5백62만명의 취학아동, 천명당 80명의 신문 구독자 등으로 국력의 성장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이제 전래의 실의 좌절감 퇴영은 서서히 물러가고 근대화에의 전진속에서 민족의 위신과 존엄을 되찾아 경제주권을 공고히 다진 것이다.
일제 부속품을 조립한 자동차이기는 하지만 「새나라자동차」라는 이름의 국산 자동차가 탄생했다. 당시 한국은 가구 하나 변변히 생산하지 못할 때였다. 艾씨는 『5·16 전에 우리나라가 가진 기술은 리어카 만들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드럼통을 두들겨서 고물 엔진을 단 시발택시와 버스를 만드는 정도였다』고 했다. 새나라자동차에 들어간 국산품 가운데 품질기준을 통과한 것은 한국타이어가 유일했다고 한다.
급하게 만든 만큼 「새나라자동차」는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택시 운전사들은 『국산 시트의 스프링이 전부 끊어져서, 손님들의 엉덩이를 찌른다』고 항의를 했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국산 자동차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 찬란한 민족의 중흥을 위해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고 전폭적으로 호응할 것을 .......
..... 더 이상 우리가 이 찌든 가난과 오욕의 역사를 되씹고 살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 ]
1970.1.6. 조선일보
사설
70년대 경제의 과제
- 60년대의 후유증부터 씻고 넘어가자
민족중흥을 다짐해온 대망의 70년대의 새 아침이 밝았다. 이 한 십년이 저물 무렵에 이룩될 것이라는 찬란한 조국의 미래상에 가슴 벅차 오름을 느낀다. 중진국 중에서도 가장 상위권에 올라선, 완전한 자립경제가 달성될 것이라는 한십년의 여명에 서서, 우리도 위정자가 호소했듯이 온 국민에게 그와 같이 찬란한 민족의 중흥을 위해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고 전폭적으로 호응할 것을 소리높혀 외치고 싶을 뿐이다.
더 이상 우리가 이 찌든 가난과 오욕의 역사를 되씹고 살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 ... 정체와 퇴영을 강요해 온 구래의 멍에를 또 다시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 씌워줄 수는 없는 것이라면, ... 비록 또 한십년의 고된 가시밭길을 헤쳐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발전의 길을 택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영과 영광은 결코 저절로 굴러 오지는 않는 것이다. 그 것은 피와 땀으로 스스로 쟁취할 수 밖에 없다. 민족의 중흥은 민족 모두의 피와 땀의 총화로써만이 달해질수 있는 것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朴(박)대통령 內務部(내무부) 지시 내용
1976.01.27 경향신문 1면
... 역행하는 부조리가 쌓였기 때문이다. 조총련이 朝總聯系(조총련계) 모국방문동포에게 대한민국에 가면 전기불도 없고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하여 산에 나무도 없으며 시골가는 길에 굶어죽은 시체가 여럿이...
朴大統領(박대통령) 年頭(연두)회견
"北韓(북한)에 食糧(식량)원조 用意(용의)"
1977.01.12 경향신문 1면
... 으로 성공해왔다. 정치,경제,군사,사회,문화부문에서 괄목할만큼 성장을 했다. 세계속의 한국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보릿고개니 초근목피니 하는 말이 없어진 것이 오랜 일이 아니다. 기적이 결코 아니다....
朴大統領(박대통령)지시 僻地醫療保護制
(벽지의료보호제)확충
1977.02.24 동아일보 1면
... 통해 농촌소득을 올릴수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새마을운동도 그런 방향으로 전개해나가라"고 지시했다. 朴(박)대통령은 또 "과거의 「초근목피」라는 말이 지금은 없어졌듯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극빈자...
보리 混食(혼식)
1985.05.28 매일경제 8면
... 총장〉 지금은 보리고개라는 말이 옛말이 되었으나 20~30년전까지만 해도 음력으로 4~5월 이맘때가 되면 굶주린 창자를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채우고 햇보리가 나오기를 하루가 三秋(삼추)같이 ...
횡설수설
1987.08.04 동아일보1면
... 되면 창궐하고 겨울이면 이로 온몸이 근질거렸으며 못먹은 데다 기생충에 까지 시달리는 판에 「건강」이 어디 있으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보릿고개에 「돈」이 어디 있었는가 ◆ 선거를 전후해 상호신용...
박정희 장군은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뒤에도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 분은 특히 먹는 데 그러하였습니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2년 그의 친구인 한양대 교수 김병희씨가 박의장 방에 들렀다가 놀란 이야기를 쓴 기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김병희씨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의장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첫 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야전사령관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하였다. 특히 그가 앉은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나무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급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였다.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더니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데 10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접해본 이들은 그가 특히 먹거리에 있어서 검소했다고 증언한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인 1970년대 중반 청와대는 경제 관련 부처 장관과 재벌총수 그리고 여야 대표 등이 참가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는데, 박 대통령은 회의가 끝난 뒤 점심식사로 우동이나 비빔밥 등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비록 말년에는 요정을 자주 찾았지만, 그의 검소한 식생활은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는 게 추종자들의 증언이다.
“그때는 쌀을 아끼느라 혼식과 분식을 장려하지 않았습니까. 박 대통령은 아침밥엔 보리를 30% 섞었고 점심엔 칼국수를 드셨습니다. 저와 부속실장 등 본관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저는 점심때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집무실 책상에서 점심을 때웠지요. 오후 서너 시쯤 되면 배가 고파 참느라고 혼났어요. 비서들은 누룽지라도 찾으러 식당을 기웃거렸지요.”
-칼국수를 드실 때 공깃밥이라도 한 그릇 같이 드시지 그랬습니까.
“아니 쌀을 아끼려고 국수를 먹는데 어떻게 밥을 먹나요. 그리고 대통령께서 그렇게 하시질 않는데 제가 어떻게….”
박 대통령은 물욕이 없었고 하물며 재산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는 분으로, 이 사실은 서거 후 모든 국민이 실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나는 그 많은 현장 확인과 현장 지도의 길에 항상 박 대통령을 자동타 또는 헬리콥터 편으로 수행하였다. 아마 나만큼 민간인으로서 헬리콥터를 많이 탄 사람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헬리콥터 기상에서 여기저기 우뚝 솟을 아파트 단지, 아름다운 농촌 주택, 크고 작은 공장들과 대규모 다목적 댐과 방조제, 그리고 간척지 등을 내려다보며 마치 대통령 자신의 아파트나 집과 공장들이 늘어나고 대통령 소유 농장의 구조물이 이것저것 늘어나는 듯 기뻐했다. 박 대통령은 자기 개인의 재산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가 잘 되는 것만 바라고 또 기뻐했다.
나는 박 대통령 집무실에 있던 파리채를 기억한다.
박 대통령이 살던 본관 2층과 집무하던 1층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전기를 아끼려는 뜻이었다. 선풍기는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다. 한여름에 열기가 닥치면 박 대통령은 창문을 열었고 열린 문으로 파리가 날아들어 오곤 했는데 박 대통령은 파리를 잡기 위해 파리채를 휘두르곤 하였다.
2층 서쪽 구석에 있는 내방은 오후 내내 뜨거운 햇볕으로 달구어졌다. 땀이 많이 흘렀지만 대통령이 틀지 않는데 내가 선풍기를 돌릴 수는 없었다.
박 대통령은 아침, 저녁으로 밥을 먹을 때 꼭 30%는 보리를 섞었다.
지금처럼 건강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쌀을 아끼려고 혼식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점심을 멸치나 고깃국물에 만 기계국수였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나, 의전수석, 비서실장 보좌관 등 본관 식구들은 똑같이 국수를 먹었다. 장관들도 청와대에서 회의를 하는 날이면 점심은 국수였다.
박정희는 과학기술도 없고, 자원도 없고, 자본도 없는 3무에서 시작하여 99%의 국민을 한데 모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에 이르기까지 일자리를 무려 1천만 개 이상 창출하여 90%가 적빈층이었던 국민을 70% 이상 중상층으로 끌어올렸다. 새마을운동으로 농가 소득을 도시 가구 소득과 역전시키기까지 했다.
1977년에는 신년사에서 당당히 북한에게 쌀을 무상으로 원조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미군을 이용하여 군비를 줄임으로써 경제건설을 우선시켜 국부를 비약적으로 늘린 결과 1979년에는 불과 GNP의 6%로 자주국방도 거의 달성했다.
‘남북협상론’ ‘중립론’ 그리고 ‘평화통일론’ 등이 공공연하게 대두됐다. 참의원에서 여운홍 의원은 1961년 1월 남북협상을 공개적으로 제기했으며 고정훈씨를 선봉자로 한 혁신세력은 조총련계 자금으로 설립된 민족일보 등을 이용해 사회주의를 외치는 북을 두들겼다. 5·16 쿠데타가 발생하기 한달 전인 5월13일 서울운동장에서는 ‘민주자유통일’이라는 학생단체가 ‘남북학생회담’을 판문점에서 가질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 4·19 이후에 무려 1836회의 데모가 발생했고 데모에 동원된 인원은 95만명으로 알려질 정도였다. 데모가 끝나면 으레 난동으로 변했고 사회질서는 거의 파괴된 상태로 방치됐다고 봐야 했다.
4·19 혁명주체가 아니었던 장면정권은 자연 비혁명적 방법으로 국사를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4·19 혁명의 주체를 이룬 학생층, 특히 젊은층과 마찰을 빚게 됐고 그들에게 끌려다니는 허약한 양상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자유만을 부르짖는 1500여 종의 출판물이 쏟아져 나와 장면정권을 무비판적으로 공격하자 무정부상태가 될 정도로 사회 혼란이 심했다. 사회가 불안해지자 경제는 침체됐고, 특히 행정력과 경찰력이 약화됨으로써 신문은 매일같이 밀수를 비롯한 경제악(經濟惡)을 보도했다.
혼란상태를 틈타 1961년 1월2일에는 650대 1이던 환율을 1000대 1로 인상하더니 한달 후인 2월2일에는 1300대 1로 인상하는 최악의 상태를 초래했다. 물가는 졸지에 폭등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군사혁명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5·16이 나던 무렵은 도저히 나라가 유지될 수 없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였습니다. 뭔가가 일어나야 한다는 분위기였지요. 4·19는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4·19 이후 들어선 민주당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는 바람에 학생들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역할을 더 많이 했습니다. 오히려 혼란을 조장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지식인들 중에는 비록 바람직하진 않지만, 보다 건전한 생각을 가진, 애국심으로 충만한 군인들이라도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이가 적지 않았어요. 그랬기에 저는 5·16이 터지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윤보선씨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5·16이 좌익혁명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고, 박정희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고 보니 상당한 기대를 걸게 됐어요.
‘민생고 해결’ 다짐과 청렴함에 기대
박 : 박정희씨를 처음 만나신 게 언제입니까.
강 : 쿠데타 직후였죠. 그때 장도영씨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었고, 박정희는 부의장이었습니다. 육군 소장 군복을 입고 퇴계로 보훈처회관 3층에서 저를 만났습니다. 진솔하게 대화를 나눴는데, 그 내용이 ‘동아춘추’라는 잡지에 자세하게 나왔어요.
다만 제가 그를 호의적으로 본 것은 혁명공약 중에 국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내용(‘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정희씨는 정말 가난한 농촌에서 농민의 설움이 뭔지, 굶주림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래서 “민생고를 해결하고 부정부패를 뿌리뽑으면 자연히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고, 그러면 저절로 민주주의를
작성일:2021-10-17 22:05:12 121.67.1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