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아쉽지만 '카피 국가' … 남들이 만든 세상 비평보다 직접 참여문화로

벽 앞에 선 대한민국, 이 벽을 넘어서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예술·과학 등 각 분야 석학들이 모였다. 미래 세대에게 이 벽을 넘어설 통찰력을 전수하겠다는 게 목표다. 배철현(서울대 종교), 최진석(서강대 철학), 김성도(고려대 언어), 김개천(국민대 디자인), 서동욱(서강대 철학), 김대식(KAIST 전자전기공학), 정하웅(KAIST 물리) 교수와 더불어 주경철(서울대 서양사) 교수가 의기투합했다. 청년들을 위한 사숙(私塾) '건명원(建明苑)'을 만든 것. '밝은 빛을 세우는 터전'이란 뜻이다. 이 사숙에서 19~29세 청년 30여명을 뽑아 1년 동안 인문·과학·예술에 대한 사유의 기초를 가르쳐 스스로 벽을 넘어서는 힘을 가진 인재로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자는 게 포부다. 일본의 마쓰시다 정경숙이나 옥스퍼드대가 고전 중심 교육과정을 현대화한 PPE(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 수준을 넘어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맞게 디지털 기술과 인문학·예술을 융합해서 가르칠 예정이다. 개원(開苑)에 앞서 배철현, 최진석, 김대식, 김개천 교수가 나눈 방담(放談)을 요약했다.

 
▲ '건명원' 개원을 앞두고 앞으로 강의를 맡을 교수들이 지난달 조선호텔에 모여 '벽 앞에 선 대한민국, 이 벽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제로 의견을 나눴다. 이날 김대식, 최진석, 배철현, 김개천 교수(왼쪽부터)가 참석했다. / 김지호 기자최진석 한국은 지금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는 문턱에 서 있다. 그런데 바로 앞에 보이는 선진국이란 고지는 잡힐 듯 말 듯 가까워지지 않는다. 뭐가 잘못된 걸까. 커다란 벽이 서 있는 느낌이다. 돌아보면 한국은 넘어야 할 벽들을 착실히 넘었다. 해방과 건국, 빈곤에서 벗어나는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 시대의 과제들을 무난히 완수했다. 그런데 이런 과거의 벽들은 구체적이고 눈에 보였지만, 선진화라는 벽은 그렇지 않다. 선진, 선도, 창의, 상상, 장르, 개념을 창조하는 지성적이고 인문적인 돌파력을 가져야만 넘을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가 어렵고 돌파하는 노선(路線)을 찾기 쉽지 않다. 지금은 틀에 갇힌 사람들끼리 모여 각자 자기 주장만 할 뿐, 함께 이 틀을 벗어나 새로운 단계로 상승하려는 꿈을 만들고 공유하려는 의지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美영화 '인터스텔라'통해 본 사유의 깊이

김대식 세계를 오리지널과 카피(copy) 나라로 나눌 수 있다면 한국은 아쉽지만, 카피 국가에 머물고 있다. 오리지널의 아우라(aura)를 갖지 못한다. 선진국이 만든 오리지널과 비슷한 카피를 만들어 열심히 팔아왔던 게 부끄럽지만 솔직한 과거 우리 모습이다. 그러다보니 과학에서 노벨상, 경제에서 창조 기업, 정치에서 독자적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외부 기운에 의존하며 살았다. 이웃 일본과 비교해도 노벨상(일본 22명, 한국 1명)이나 건축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일본 7명, 한국 0명) 등 선진국이란 위상에 걸맞게 내세울 수 있는 업적이 없다. 애플과 비교한 삼성의 창조력 현황, 북핵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아무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하는 외교력도 이런 알맹이 없는 공허함을 반영한다. '우리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 거야?'라는 질문을 서로 나눠 가져야 할 때다.

최진석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미국이란 나라가 지니는 선진국으로서 사유의 깊이와 폭을 절감할 수 있다. 시공간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그 사유를 화면에 풀어내는 힘은 제국으로서 세계를 지배해보지 못한 나라로서는 감히 시도해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언제까지 이렇게 남들이 만든 걸작을 손뼉 치고 숭배하면서 살 수만은 없다. 존경은 그만하고 질투가 필요하다. 질투가 힘이 되어 스승을 넘어선 제자의 각성이 나타나야 할 시점이다. 다행스러운 건 상황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면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대를 정확히 읽어내면 실마리가 보인다. 세계를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인식하면 출발선이 어딘지는 알 수 있는 법이다.

배철현 그 출발선을 인문, 과학, 예술을 통합한 교육을 통하여 찾고자 한다. 인간의 창의는 가치, 의도, 미(美)적 판단, 사회적 정서, 그리고 개인 의식 수준과 긴밀하게 작용하면서 서서히 드러난다. 예술과 인문학도들도 수학·과학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인문·예술에 해박하면 수학·물리학은 몰라도 되는 줄 착각했지만, 우주를 설명하는 수학적 공식은 고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이나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만큼 숭고하고 심오하다. 햄릿을 모르는 것만 무식한 게 아니다. 유전자와 염색체, 미분과 적분의 차이를 모르는 것도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인문·과학·예술 통섭하는 지식인 양성

김개천 조선 시대나 르네상스 시대 지식인은 이 모든 학문에 통달한 존재를 가리켰다. 선비는 문사철(文史哲)뿐 아니라 시서화(詩書畵)와 의술(醫術) 등 자연과학, 무술(武術)까지 능통한 전체적 인간이 되려 했다. 이 시대 예술과 디자인은 특정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잠재력을 일깨우고 창조적 영토를 제공하려 했다. 앞으로 이런 지식인 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자라는 식으로 규범을 내세울 게 아니라 삶의 매 순간 자신에게 몰두해 보는 게 중요하다. 이러면 오히려 정서적 안정을 통해 자유롭고 예술적인 삶이 가능하다.

배철현 디지털 혁명은 기술과 창조적 산업이 융합하면서 탄생한다. 창조적 산업이란 미디어, 패션, 음악, 엔터테인먼트, 교육, 문학, 예술, 종교, 철학 등에서 발견될 수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 혁신은 과거의 산물들, 책이나 신문, 잡지, 노래, TV, 영화 등을 디지털과 접목하면서 이뤄졌으나, 이제는 기술과 창조적인 인문학, 예술과 상호작용을 통해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형태를 지닌 미디어를 탄생시킬 것이다. 이 혁신은 아름다움을 공학에, 공학을 인문학에, 시(詩)를 컴퓨터에 연결시킬 능력이 있는 자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새로운 혁신가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인슈타인 또는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알려진 에이다 러브레이스를 따르는 영적이며 정신적인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글로벌 지적 향연에 동참할 수 있어야

김대식 이런 이질적인 학문들이 한 존재 내면에서 충돌하면서 새로운 사유의 틀을 만들어낼 때 그 마찰열은 창조의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 영국과 미국 정치인들이 만나서 어떤 얘길 할 것 같은가. 교양과 사유를 통해 다져진 그들의 내공은 남다르다. 영미 엘리트들은 주요한 대화 주제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 공감대가 대화와 협상에서 편을 가르는 기준이다. 복잡한 외교적 현안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앞서 지적인 한담을 통해 정신적인 교류를 펼친다. 여기서 서로 코드가 맞으면 본 협상은 쉽게 풀린다. 우리 정치인, 기업인도 이런 지적(知的) 향연에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근래 기업 사이에서 퍼진 인문학 열풍은 도구적 측면에 치중했다. 인문학을 수익 증진이나 판매 향상의 방편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종종 엿보이는데, 그런 식의 얄팍한 접근 방법으로는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다. 응용수학이나 컴퓨터 공학에는 로컬 솔루션(또는 로컬 옵티멈)과 글로벌 솔루션(글로벌 옵티멈)이란 게 있다. 전자는 부분적인 해답을 뜻하고 후자는 전체적인 해답을 가리킨다. 글로벌 솔루션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로컬 솔루션에 매몰되다 보면, 폐렴인데 감기약만 계속 주는, 즉 임시방편으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오류를 반복한다.

김개천 이런 교착상태를 벗어날 능력을 이제 미래 세대에게 전수해야 한다. 진리와 선, 공익 같은 근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 자발성이 공공을 이루는 시대로 만들어가는 그런 인재들이다. 얼마 전 국가적 디자인 행사 때 보니 '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이란 구호를 붙여놓았더라. 21세기에 여전히 과거의 틀을 답습하는 모습이다. 공공성이 개별성을 가두는 시대적 패러다임으로는 창발(創發)적인 인재가 태어날 수 없다. 각자가 개별적 존재로서 자부심을 갖고 세상과 맞서야 한다. 비평가가 돼선 곤란하다. 남들이 만든 세상을 비평할 게 아니라 직접 참여해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문상철 기자 77ms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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