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강진욱 기자 = "한국 내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기가 힘들지만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 외롭지는 않아요."

2000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는 로넬 차크마 나니(41) 씨는 23일 "줌머족이 워낙 소수이고 방글라데시도 그다지 주목받는 나라가 아니다 보니 줌머족에 대한 탄압을 알리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방글라데시 남동부 치타공 산악지대에 사는 '줌머족'의 후예인 그는 '재한줌머인연대'를 10년 넘게 이끌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줌머족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방글라데시 대사관 앞에서 시위도 하고 국가권력과 인권에 대한 강연을 다니다 보니 어느새 그에게는 '인권운동가'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그가 한국에 온 이유를 묻자 그는 "우선 방글라데시와 줌머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11개 소수민족 약 65만명(전체 인구의 0.7%)의 통칭인 줌머족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시절에는 자치권을 행사했지만 1947년 인도 해방과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에 이어 1971년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는 과정에서 줌머족 자치권은 점차 훼손됐다.

'벵갈족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방글라데시는 1억5천만 인구를 가진 이슬람국가로, 현재 방글라데시 남동쪽 치타공 산악지대에 살면서 대부분 불교를 믿는 줌머족의 자치권을 보장해주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산악지역에까지 밀려드는 산업화와 개발의 파고로 줌머인들의 삶터는 계속 파괴되고 있다.

로넬 씨는 "개발을 이유로 언어와 문화, 종교, 역사가 다른 소수민족의 삶터를 빼앗는 것은 반인륜적이고 반문명적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투쟁과 저항으로 수만명이 사망했고 1997년 방글라데시 정부와 줌머족 사이의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 이내 유명무실해졌다. 이후 탄압이 격화되고 저항이 격렬해지면서 로넬 씨 등 저항에 앞장섰던 이들은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이런저런 차별을 감수하면 그럭저럭 살 수도 있었겠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렇게 사는 것이 싫었다"고 말했다.

한국은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었다. 처음에는 가까운 인도로 갔고 이어 태국과 라오스 등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임시거주자로 생활했다. 태국에서는 잠시 불교대학에 다닌 적도 있다.

그는 "일본이나 유럽 등지로 간 동료도 많았지만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한 한국에서 줌머의 존재를 알리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동안 공장을 전전해야 했던 한국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그와 같은 처지의 줌머인들이 하나 둘 늘어났고 줌머인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지인들을 만나면서 2002년 '재한줌머인연대'를 꾸렸다.

처음에는 7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20여 가족 70명가량으로 늘었고 이 중 65명이 한국정부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를 포함해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들이 방글라데시에 있는 가족들을 초청하면서 식구가 늘어난 것이다.

로넬 씨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을 위한 통역이나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난민이 대부분인 재한 줌머인들은 공장 등지에서 일하며 생활한다.

줌머인들은 민족을 보전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 결혼도 끼리끼리 하며 매년 4월이면 방글라데시 설인 '보이사비' 행사를 함께 치른다. 로넬 씨의 아내도 줌머인이다.

로넬 씨는 "2세들은 좀 더 개방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줌머족의 정체성은 계속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서 살아갈 아들을 위해 2011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아들도 한국인이 됐다. kjw@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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