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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섭 “6.25전쟁은 북침, 증거는 많다!”안학섭 “우리 언론들 공정과 진실성 잃어”
박귀성 기자  |  skanskdl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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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27  06: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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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프레스 = 박귀성 기자] 평화통일운동가 안학섭 선생이 6.25 전쟁 68주년을 맞아 이 ‘동족 상잔’의 비극은 남측 이승만 정권과 미국의 북한 침략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안학섭 선생은 6.25 전쟁 68주년 당일인 25일 본지 기자와의 대화를 통해 이같이 주장하고 “6.25 전쟁이 북침이라는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

안학섭 선생은 먼저 우리 언론과 사회적 인식을 지적하면서 “현송월이 처형됐다는 보도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음해와 모략성 보도는 응당한 책임과 배상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작금의 ‘북핵시설 폭파 현장에 동참한 기자단에 대해 북한측에서 1만 달러를 요구했다’는 보도를 예로들며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안학섭 선생은 이어 “언론에 바라는 것은 남북 문제에 있어서 지금이라도 민족적 양심을 가지고 정당하게 있는 그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안학섭 선생은 이어 한만은 과거 6.25전쟁에 대해 “남북 6.25전쟁에서 북한이 남쪽을 침략했다며 ‘남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됐다. 그것은 며칠전 사망한 김종필도 이야기했다”고 주장했다.

   
▲ 평화통일운동가 안학섭 선생이 지난 25일 강화도 소재 한 재마밭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점심으로 냉면을 먹고 있다.

안학섭 선생은 ‘6.25전쟁이 북침이라는 근거가 있느냐?’는 질문엔 “북침이라는 근거가 많다. 우선 남조선은 북침을 준비하기 위해 남조선에서 있던 박헌영 이주하 김삼룡 등 이승만 정권을 반대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지하세력을 완전히 정리했다”고 설명했다.

안학섭 선생은 6.25전쟁 이전에 북한 인민군측 의용군 지원에 대해 “의용군 지원은 있었지만 학교에서 퇴짜를 놨다. 전시니까 보급도 않되고 학교에서 (의용군에) 집단으로 나가서 학교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해서, 고향인 강화 개성공립고등중학교 7월 10일날 고향이 강화였던 관계로 강화로 돌아왔다 그해(1950년) 7월 8일. 그후 북측 정부에서 불렀다. 인민공화국 치하였기에 인민군이었다. 3주 정도 교육을 받고 배치가 됐다”고 인민군에 귀속된 과정을 설명했다. 해방 직전 안학섭 선생의 고향 강화도 일부는 북한측 영토였다고 부연했다.

안학섭 선생은 이어 “민청에 나가서 일을 하게 됐는데, 9월 인천상륙작전이 있어 후퇴명령을 받고 개풍군 쪽으로 후퇴를 했다가 다시 3일 만에 북한 행정기관이 강화로 왔다. 9월 28일 서울수복 이후 강화에서 인민군 쪽으로 수천명이 합류해서 후퇴했다. 당시 나는 처음엔 못나갔고, 강화에서는 남한 우익들의 숙청작업이 있었다. 일단 후퇴했다가 강화읍에 다시 들어오니 당시 북한측 기관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나 그 잔류 가족들을 대량학살하기 시작했다. 학살 이유는 ‘빨갱이 잔류가족’이라는 거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안학섭 선생은 잔혹했던 대학살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때 학살을 자행하던 자들이 북한의 행정기관이 다시 들어오게 되니까 기관에 잡혔고 처형이 됐다고 나중에 듣게 됐다. 당시 우익이 희생된 사건”이라고 정리했다.

안학섭 선생은 나아가 “나중에 강화를 떠나 후퇴했는데, 개성 뒤에 토송이 있고 여현을 통해 남천까지 후퇴를 했다. 이전까지는 기관원으로서 활동하다 의용군에 지원을 하게 됐다. 잉크 병이 어는 그런 추운 방에서 살았다. 그때 치질이 심해서 몹시 고생을 했다. 항문에서 피를 많이 쏟고 고통이 심했다. 해서 인민군 정규군으로 입대했지만 일주일만에 제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기관원 신분으로 후퇴를 하다가 중국 집안 초산 맞은쪽까지 갔는데, 미군과 연합군이 밀고 올라가니까 중국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고 6.25전쟁 발발 이후 서울수복과 연합군의 북진 당시를 회고했다.

안학섭 선생은 다시 ‘일단 북한이 남한땅 대부분을 점령했을 때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인민재판으로 많은 양민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묻자 거세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절대 그럴리 없다. 인민군은 매우 신사적으로 전쟁을 치렀다. 조선노동당 기본정책이 인민을 중시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중국의 모주석이 조선 인민군과 연합해서 참군할 때 ‘3대 기율 8항 주의’를 내세웠고, 매우 엄격했다. 이를 어긴자는 무조건 처형했다”고 인민군대가 남한을 침공했을 당시 양민을 학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안학섭 선생은 실례로 “내가 직접 봤는데, 어느 예쁜 여자가 인민군 지원군 소대장을 유혹을 했다. 이 두 남녀가 마치 남자가 여자를 강간을 하려는 모양으로 보여지는 장면이 포착됐는데 서로 실랑이 하는 장면을 한 대원이 와서 ‘소대장이 여자를 겁탈하려 한다’고 오해해서 왜곡 보고를 했다. 지역 유지들이 나서서 그 여자는 남편이 있을 때도 바람을 피우고 평소에도 품행이 방정하지 못했다고 소대장을 위해 증언을 해주는데도 오히려 군대에서는 인민군 지원군 소대장을 처형했다. 직접 봤다”고 설명했다.

안학섭 선생은 나아가 “소대장을 살리기 위해 지역 유지들이 탄원서를 모아 제출했다. 3-4번 재판을 하더니, 인민군대가 유지들의 이런 노력에 ‘고맙다’고 인사를 했지만 ‘철저한 군사행동 기율이 있어 처형할 수 밖에 없다’며 소대장을 처형했던 것”이라면서 “이런 엄격한 3대 기율 8항 주의의 인민군대가 양민을 학살할 조건도, 여건도, 동기도 없었다. 가령 강간을 했다하면 즉결처분권에 의해 총살했다. 내가 아는 범위내에서는 양민학살이나 대민 노략질 등은 절대 없었다”고 단언했다.

안학섭 선생은 자신이 체포되는 과정에 대해서 “남파됐을 당시가... 1952년 7월8일 남파됐다. 인민군이 금강산 넘어서 강원도 간성 고성 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난 오대산 설악산 쪽으로 정치부대장과 노동당 중앙당 남한 파견 지도원 및 대원 등 6명이 함께 조를 이뤘고 내가 조장이었다. 지령은 조선 노동당 강원도당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북에서 내려올 때 짐을 많이 가지고 내려왔다. 압축빵이라고 하는 전투식량을 넣은 배낭과 무거운 장비들이었다. 대원들이 학생 출신들이라 어리고 몸들이 약해서 애를 먹었다. 무전기 총, 식량 등을 가지고 설악산 들어오다가 국군의 매복에 걸려 대원 2명이 죽었고 1명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당 지도원들은 자신들 갈 곳으로 가버렸고, 부소대장하고 대원 1명하고 나, 이렇게 3명이 움직이다 다시 또 강릉 서쪽 발왕산에서 우리도 흩어지게 됐다. 당시 책임은 내게 있었다. 월동(겨울 동안 숨어 지냄)을 야산에서 했는데 인민군 951부대를 설악산에서 만났다. 소대장하고 분대장 대원 2명이 수색정찰 중 우리를 발견한 거다. 겨울이 지나고 4월, 봄이 돼서 해빙기를 맞아 강원도당에 도착했다”고 설명했다.

안학섭 선생은 이어 “강릉 남쪽에서 전투가 벌어져서 동지들이 흩어져서 다시 혼자가 됐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때 대원은 자수하고 나는 혼자 남진하다 잡혔다. 그 과정에서 5-6번 정도의 총격전을 치렀는데 온 몸에 총상도 많이 입었다. 1953년 4월에 잡혀 옥살이를 시작해서 43년 꼬박 옥살이를 했다”고 미전향 장기수로서 감옥살이로 반평생을 보내야 했던 과정을 이야기 했다.

안학섭 선생은 6.25전쟁 전후로 한반도의 이념적 분열에 대해 “고종사촌의 아들이 있는데 해방 후 초등학교 교장을 하고 있었다. 좌익운동을 해서 국군에 의해 학살됐다. 내가 나중에 (감옥에서) 나와서 물어보니 ‘인민군대가 나와서 죽였다’고 거짓 선전이 돼 있었다. 모두 그렇게 잘못 알고 있더라. 직접 본 피붙이들은 두려워서 거짓선전에 대해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함구했다. 그들은 고문도 받았다. 그러나 내가 곰곰이 알리바이를 되짚어보니 고종사촌 아들이 학살될 당시 강화엔 인민군대가 없을 시절이었고, 국군이 들어왔을 때였다. 해서 내가 따지고 들었더니 친척들이 울면서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안학섭 선생은 ‘6.25 전쟁 당시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지원받아 남침을 감행했다’는 주장에 대해 “김일성 주석이 스탈린으로부터 지원받은 것인데, 무기 지원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나누고 미국과 소련이 8년 동안 주둔한 후 가지고 들어온 무기를 모두 이양하고 양측 모두 철수하기로 했기에 당연히 소련제 무기가 북한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면서 “그러나 남한은 무기를 계속 미군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남한은 제식이나 의식 자체도 미군식이다. 정전 협정 당시에는 신무기를 들여오지 못하게 됐고, 고장난 무기만 교체할 수 있었다. 이것이 협정이지만 미국이 이를 어겼다”고 말했다.

안학섭 선생은 또한 “내가 볼때는 6.25전쟁 이전부터 송학산 전투, 장단반도 전투, 옹진군 등지에서 전투가 잦았다. 북한이 대량의 소련제 탱크나 무기를 지원받았고 남측은 이렇다할 무기가 없다고 했는데, 그건 거짓말이다. 1949년 7월 전투에서 개성 시민들 사기를 앙양시킨다면서 국군이 탱크를 동원해서 개성 시내에서 군사퍼레이드를 한 것을 내가 직접 목격했다. 개성 인근 지역에서 국군의 대대적인 포사격도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6.25전쟁 당시 우리군의 무기가 열악했다는 설에 대해 강력히 부정했다.

안학섭 선생은 미군이 배후에서 6.25전쟁을 촉발시켰다고 주장하면서 “비교를 해보면 알 수 있다. 맥아더가 미주리 함대에서 ‘조선은 점령지로서 주둔군인 미군이 미군법으로 군정을 실시하겠다’ 포고령을 내렸지만, 북한에 들어온 소련의 시찌코프는 ‘조선은 이제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다.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니다. 풀 한포기 돌 하나도 당신들의 것이다. 어떻게 가꾸느냐는 당신들의 몫이다’라고 했다. 즉, 이것이 바로 북침을 목적으로 하고 준비하고 있던 미군이다”라고 이를 북침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안학섭 선생은 6.25전쟁이 끝나고 판문점에서 맺은 정전협정에 대해선 “정전협정 후에도 6개월 내에 고위급 정치회담을 하도록 되었지만 미국이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임하지 않았다. 중국 지원군은 북한에서 6년인지... 8년인지... 주둔하다가 모두 철수했지만, 미군은 이것도 어겼다. 지금까지도 주둔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학섭 선생은 이날 본지 기자와의 대화 말미엔 “너무도 잔혹했다. 사람 손을 뒤로 묶어서 비행기처럼 매달고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혀가 입 밖으로 길게 빠져나왔는데도 계속 때리고만 있었다. 어찌 이럴 수 있나? 이게 우리가 바라던 해방된 조국인가?”라며 잠시 불시울을 붉히더니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한편, 안학섭 선생은 서울정치학원에서 공부했고 민청훈련소에서 정치교육을 받고 지난 1952년 남파된 후 이듬해 체포돼 비전향장기수로 43년 10개월을 감옥에서 살다 1995년 출소했다. 안학섭 선생은 이날 일제시기였던 15세중학교 2학년때부터 주재소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이모님 집으로 피신해서 숨어 지냈다고 했다. 안학섭 선생 위로 형님 두 분이 있었는데 학교는 다니지 못하고 군대에 끌려갔고 큰형님은 그때 북해도에 작은형님은 훈련소에 있어 안학섭 선생이 편지심부름을 하다 당시 20원(일본 고위공무원 월급이 27원하던 시기)을 작은 형에게 부쳐줬는데, 이 돈이 도착하자마자 작은 형은 일본군 훈련소에서 탈영했다. 때문에 안학섭 선생과 작은형이 공모했다 하여 안학섭 선생 가족은 모두 도망자가족으로 몰려 일본순사들에게 취조를 받으면서 괴롭힘을 당했다.

박귀성 기자 / skanskdl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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