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분실에서 불법 구금·고문으로 인한 강제 허위 진술

1980년대 일명 '불온 서적'으로 지목된 역사가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1980년대 일명 '불온 서적'으로 지목된 역사가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1980년대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에서 활동하던 중 일명 '불온 서적'을 읽었다는 이유로 체포·구금된 50대가 32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서울북부지법 형사5단독 변민선 판사는 25일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등을 읽고 반정부활동을 했다는 혐의(국가보안법위반 등)로 기소된 김모(53)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러시아 혁명사' 등 서적은 현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에서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며 "김씨가 반국가단체 등을 찬양·고무하거나 이에 동조할 목적으로 소지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어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거의 유일한 증거인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또한 가혹행위에 기초해 작성했기 때문에 그 임의성과 신빙성이 의심된다"며 "김씨가 재판 과정에서 내용을 부인했고, 검찰에서도 이를 보강할 증거가 없어 유죄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또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대 아래 불법 감금·가혹행위를 당한 점을 사법부가 눈감고, 인권의 마지막 보루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점에 대해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깊이 사과드린다"며 "재심 판결을 통해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김씨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앞서 김씨는 지난 1981년 6월23일 경희대학교에 재학하던 도중 반정부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전민학련 관계자들과 함께 검찰에 영장 없이 불법 연행·구금됐다.

김씨는 한달여 뒤 석방됐지만 같은해 9월29일 다시 영장 없이 불법 구급됐고, 수사관들은 구금 기간 동안 김씨를 고문·협박·회유해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활동을 했다"는 진술을 강제로 받아냈다.

또 검찰은 김씨 등 전민학련 관계자를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했으며, 법원은 이들이 재판 과정에서 일관되게 공소 사실을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죄 판결을 내렸다.

당시 검찰이 김씨가 '의식화 과정'에서 읽었다고 밝힌 서적은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러시아 혁명사', 안병욱의 '도산사상', 권세원의 '사회사상사' 등 정치경제학과 철학 서적·복사본으로 드러났다.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들이 대공분실에서 불법 구금·고문으로 허위 진술했고, 진술 내용을 번복하면 다시 대공분실에서 고문받는다고 위협받아 진술한 조서인 점을 감안해 유죄 증거로 사용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의견을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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