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만에 다리 들어올린 부산 영도대교     (부산=연합뉴스) 부산시는 25일 영도대교 도개교 시운전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에서는 길이 31.3m, 무게 590t인 영도대교 도개교 부분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2013.7.25   >    osh9981@yna.co.kr
47년만에 다리 들어올린 부산 영도대교 (부산=연합뉴스) 부산시는 25일 영도대교 도개교 시운전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에서는 길이 31.3m, 무게 590t인 영도대교 도개교 부분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2013.7.25 > osh9981@yna.co.kr

(부산=연합뉴스) 신정훈 기자 = 부산시 지정 기념물(제56호·2006년 지정)인 영도다리(공식명칭 영도대교)는 굴곡의 부산 근대사와 함께 하는 교량이다.

영도다리는 섬이었던 부산 영도구 대교동과 중구 대청동을 잇는 부산 최초의 연륙교(길이 214.6m, 폭 18.3m, 높이 7.2m)로 건설됐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일엽식 도개교' 형식으로 건설돼 개통 당시 전국적인 유명세를 누렸다고 한다.

도개교란 돛이나 굴뚝이 높은 큰 배가 다리에 걸리지 않고 그 밑으로 운항할 수 있도록 상판을 들어주는 기능을 가진 교량을 말한다.

다리가 개통될 당시 육지 쪽(중앙동) 다리 31.30m를 하루 2∼7차례 들어 올렸으며, 도개 속도는 고속(1분 30초), 저속(4분) 2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다리 위로 궤도(電車軌道)도 설치돼 전차도 다녔다고 한다.

개통 당시 다리가 하늘로 치솟는 신기한 모습을 보고자 부산을 비롯한 인근 김해·밀양 등지에서 6만 인파가 몰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영도다리의 시작점에는 어두운 수탈의 역사가 쓰여 있다.

일제 강점기,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한 보급과 수송로 구축을 위해 영도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1931년부터 다리가 준공된 1934년까지 수십만 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동원됐고 많은 이들이 공사과정에서 희생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6·25 한국전쟁 당시에는 급히 피란길에 올라야 했던 피란민들의 이산가족 찾기 장소, 즉 '만남의 장소' 역할을 하면서 그들의 숱한 애환과 고향을 그리는 그들의 애수가 묻어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영도다리의 상징인 도개기능은 중단됐다.

다리를 들었다 내리는 기계가 낡고 교통량도 늘면서 도개 기능 중단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결국 이 다리에 붙어서 영도로 들어가는 상수도관이 놓이게 됨으로써 1966년 9월 도개를 멈췄다.

또 섬인 영도와 내륙 간 늘어나는 교통량과 물동량 소화를 위해 1980년 현재식 교량인 부산대교가 건설되면서 '부산항의 상징'이란 명성도 퇴색돼 갔다.

더욱이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자리한 '영도다리'란 이름 대신 부산대교 준공 직후 영도대교로 명칭이 변경됐고 2003년 재난 위험 등급판정까지 받아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이후 오랫동안 철거 논란을 빚다가 뜻있는 많은 시민의 노력으로 2009년 '교량 해체 후 복원' 결정이 내려지면서 2010년부터 복원공사가 진행됐다.

복원된 교량은 왕복 4차로에서 왕복 6차선으로 넓어졌고 47년 전 도개기능도 재개((하루 1번)한다.

영도다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체면적 1천752㎡, 지상 2층 규모의 전시관도 함께 문을 연다.

sjh@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코리아프레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