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근 소방교 16년째 연평도 근무포격도발 이후 소방 인력·장비도 확충

연평도 포격 화재 초기진압 주역 신효근 소방교    (인천=연합뉴스) 2010년 연평도 포격 당시 초기 화재진압으로 대규모 피해를 막은 인천 중부소방서 연평119지역대 신효근(42) 소방교.   2013.11.18          inyon@yna.co.kr
연평도 포격 화재 초기진압 주역 신효근 소방교 (인천=연합뉴스) 2010년 연평도 포격 당시 초기 화재진압으로 대규모 피해를 막은 인천 중부소방서 연평119지역대 신효근(42) 소방교. 2013.11.18 inyon@yna.co.kr

(인천=연합뉴스) 강종구 기자 =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인천 연평도.

당시 연평도의 유일한 소방관인 신효근(42) 소방교는 '콰쾅'하는 폭발음이 들리자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섰다.

포탄 여러 발이 마을 곳곳에 꽂혔다.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사방에 퍼졌다. 연평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신씨는 직감적으로 포격의 진원지가 북쪽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인천시 소방안전본부 상황실로 연락해 상황을 전파하고 화재 진압에 나섰다.

화재 진압 인원은 신씨 외에 펌프차를 몰던 기능직 공무원 이성원(44)씨, 그리고 의용소방대원인 마을 주민 5명 등 7명이 전부였다.

연평119지역대 소방펌프차를 몰고 화염에 휩싸인 집들을 향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펌프차에 최대 2천800ℓ의 물을 채웠지만 15분 정도 불을 끄면 물은 금세 동이 났다. 물을 채우려고 소방서와 마을을 50차례나 왔다갔다해야 했다.

물을 뿌릴 수 없을 땐 흙을 파서 뿌렸다. 유류창고로 불이 번질까 창고 주변의 풀과 나뭇가지를 낫으로 쳐내기도 했다고 한다.

"진화 작업 중에도 포격이 이어지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더 큰 피해를 막으려면 불이 번지는 걸 어떻게든 막아야 했죠. 물이고 흙이고 가릴 처지가 아닐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사력을 다한 신씨의 진압활동에 집 10여 채를 휘감던 불길은 오후 10시께 서서히 사그라졌다.

포격에 따른 정전으로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생라면을 먹고 허기를 달랜 신씨는 그 뒤로도 "산불이 충민회관 뒤편으로 내려오고 있다", "발전소가 위험하다" 등의 신고가 잇따르자 다시 진화작업에 나섰다.

자정을 넘기자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불길이 번지는 걸 마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화마와 사투를 이어가던 신씨는 인천에서 출발한 지원대가 포격 다음날 오전 4시 연평도에 도착했을 때야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소방관 80명, 장비 23대가 추가로 투입되면서 이날 오후 4시께 불은 완전 진화됐다.

불은 꺼졌지만 유례없는 포격에 놀란 주민들은 서둘러 피란길에 올랐다. 포격 도발 이틀 만에 주민 1천700명 중 1천600명이 섬을 떠났다. 가을철 꽃게 막바지 조업에 활기 넘치던 연평도는 순식간에 '유령의 섬'처럼 싸늘하게 변했다.

신씨도 아내, 세 아들 등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가족을 인천 육지로 보내고 섬에 남은 신씨는 복구작업에 투입돼 바쁜 나날을 보내다 두달 만에 인천에서 가족과 상봉했다.

신씨는 1998년 기능직 공무원으로 시작해 2009년 정식 소방관이 됐다. 연평도에서 지금까지 16년째 근무한 '연평도 지킴이'다.

연평도 포격 후 3년이 지난 현재 연평119지역대에는 인력과 장비가 대폭 보강됐다.

포격 당시 2명뿐이던 연평지역대에 구급대원 2명, 의무소방대원 3명이 추가로 배치됐다. 구급차 1대도 따로 마련했고 펌프차의 용량도 2천800ℓ에서 4천ℓ로 커졌다.

신씨는 18일 "전쟁터 같았던 당시 상황은 3년이 지났어도 생생하게 기억난다"며 "그때도 제 고향과 터전을 지켜야겠다는 일념뿐이었는데 여건이 허락한다면 연평도에서 계속 소방관 생활을 하며 고향을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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