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육체는 죽어 누워 있어도,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는 지금도 신중히 자기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 샹송 가수 피아프로 스타덤을 뛰어 올라 모국 프랑스 그리고 세계에서도 사후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암으로 47세에 세상을 떠난 피아프는 자신의 전속 사진사, 휴 밧셀(Hugues Vassal)씨(80)만 최후의 날들을 촬영하게 했었다.
 
 최후의 6년간, 피아프의 개인 고용 사진사였던 밧셀씨는 몸집이 작은 스타의 마지막을 찍은 시리즈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고, 피아프가 이전처럼 생명이 끝나갈 때에도 한 장 한 장의 사진에 직접 허가를 한 것을 밝히고, "그녀는 자신이 역사에 남을 것을 알고 그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을 거라는 사진을, 직접 컨트롤하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1963년 10월 10일 사망시, 피아프는 프랑스가 낳은 최대의 세계적 스타였고, 처음으로 미국을 정복한 프랑스인 가수였다.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La Vie en Rose)"와"물에 흘려(Je ne Regrette Rien)"라는 비극적인 노래와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는 전후 세대의 삶의 사운드 트랙이었다.  
 
 현재에도 피아프는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인 아티스트이다. 2007년에는 그녀의 전기 영화 '에디트 피아프 - 사랑의 찬가'에서 피아프를 연기 한 마리온 코티야드(Marion Cotillard)가 아카데미 상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사후 50년 즈음 새로 발표된 자료에서 피아프가 자신의 인생과 관련해서 만들어지거나 거짓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화제가 되었다.  최근에 간행된 "Piaf, a French Myth"(피아프, 프랑스의 신화)의 저자 로베르 벨루레(Robert Belleret)씨에 의하면, 후에 "참새"를 뜻하는 '피아프'를 예명으로 한 스타의 본명은 에디트 가숑(Edith Gassion)이지만,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길거리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1915년 12월 15일 파리의 노동자 계급 지구의 병원에서 태어난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또 다른 신간 전기에서는 어린 시절에 눈이 멀었던 피아프가 순례 후에 눈이 보이게 되었다는 '전설'을 부정하고 있다. 같은 가수였던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피아프의 어린 시절은 힘들었고 할머니 자란 것은 맞지만 와인에서 성장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한다.
 
 또한 베루레씨는, 피아프는 정치적 양심은 전혀 없었다면서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군의 수용소에서 프랑스 병사 포로의 탈출을 도왔다는 피아프 자신의 이야기를 부정하고, 오히려 파리가 독일 점령하에 있던 1942년에 피아프는 나치의 비밀 국가 경찰 게슈타포(Gestapo)의 파리 본부 근처 지역으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아프의 노래에 흐르는,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감정은 피아프 자신의 비극적인 인생에서 나온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피아프가 17살 때 낳은 유일한 아이였던 딸은 두 살때에 뇌막염으로 사망하였다. 연애 끝에 결혼 한 프랑스인 복서 마르셀 세드란(Marcel Cedran)은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다. 피아프 자신은 인생의 많은 시간을 알콜과 약물에 빠져 보냈고, 3회의 치명적인 교통 사고를 당했다.  
 
 피아프의 사후, 카톨릭 교회 파리 대주교는 신앙이 없는 피아프의 라이프 스타일을 이유로 장례식에서의 미사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수만명의 사람들이 파리 시내를 지나는 장례 행렬을 배웅했고, 관은 페르 라세즈(Pere Lachaise) 묘지에 매장되었다.  
 
 사진 작가 밧셀씨는 피아프의 사후, 그녀의 궤적을 쫓은 샤를 아즈나부루(Charles Aznavour)와 세르주 게인즈부르(Serge Gainsbourg), 조니 아리디(Johnny Hallyday) 등 쟁쟁한 프랑스인 스타들과 작업을 해왔지만, 피아프처럼 "믿기 어려운 자력"을 지닌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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